“언니, 일러스트레이션을 배우러 학원에 다닐 때요, 놀랍게도 절반 이상이 고졸이더라구요.
요즘 세상에 돈 없어서 대학 못가는 사람이 어딨어 했었는데, 그중 대다수가 형편이 안 좋아 대학을 못 갔다고 하더라고요”

일년 만에 만난 승승이 말했다. 승승은 커피를 좋아한다. 우리는 오늘 세잔째 커피를 마시기 위해 지금 커피팩토리에 앉아있다. 3년전, 군인이었던 남자친구가 부산으로 발령이 났을 때도 우리는 이렇게 커피숍에 앉아 있었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이 시작되는 8월의 마지막 주였다. 백일동안 이어질 정기국회를 위해 마음을 다잡는 것이 숙제처럼 어려웠던 시기다. 그래서 사무실에 앉아있는 시간은 더욱 답답하고 가슴 묵직했던 날들이었다.

그날 남자친구가 내려가기 전에 엄마에게 인사하고 싶어 해, 시간을 확인하려고 엄마에게 전화를 했다.
“상화야, 우리 상화 어떡하니, 그 동안은 항상 J가 있어서 보호자같이 든든했는데,
너 사는데 한번도 안 가 봐도 마음이 놓였는데... 이제 우리 상화 어떡하니”

소식을 미리 전해들은 엄마는 이렇게 말했다. 엄마 얘기를 듣고 있다 보니 눈물이 흘렀다. ‘나 이제 어떡하나’ 하는 그런 눈물이 아니었다. 엄마면서, 겨우 이런 말밖에 못하는 엄마의 마음을, 모습을 생각하려니 너무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리고 결국 세상에 덩그라니 홀로 떨어져 있는 내 모습이 연상돼 내 자신에 대한 연민이 일었던 것이다.

“엄마 나 여행갈까봐”
“일은 어떻게 하고 여행을 가”
“일? 그만두고...”
“너 일 그만두면 어떻게 하라고. 내년에 협이, 현이 대학 가야는데 우리집은 어떡하니, 너 편하게 가고 싶은 여행 다녀오라고 하고 싶은데 힘들어도 조금만 참아. 참고 J 제대하면 그때 같이 단기여행이라도 다녀와”

적중, 적중했다. 철딱서니 없다느니, 여행이 위험하다느니, 여자가 무슨 혼자서 여행이냐느니, 세상의 모든 일이 다 힘들다느니, 그런 꽉 막힌 소리로 호통이라도 쳤으면 이렇게 눈물이 나진 않았을텐데 엄마는 내 마음을 정확히 읽은 것이다. 그래서 엄마도 가슴이 아픈 것이다.

그랬다. 내게는 아무것도 없었고,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내가 책임져야 할 그 무언가가 있었다. 습관적으로 핸드폰으로 달력을 넘겨 보는데, 2006.2.14일에 이벤트 표시가 되어 있어 확인을 눌러보니 아빠의 기일이었다. 그렇다. 나에겐 아빠도 없다.

배낭여행은 대학생들의 통과의례가 된지 오래이고, 오지 여행은 한비야가 다 해버렸고, 이제 서점에 손미나 식의 기획된 여행 책마저 깔리는 마당에, 에펠탑 앞에서 찍은 촌스러운 사진 한 장만 싸이에서 훔쳐봐도 속이 쓰리듯 아팠다.

그때, 햇수 단위의 시간표를 그리면서 떠날 날을 손꼽았다. 나이, 연도, 소속, 개인관심, 돈, 가족사항, 애인 등이 나열된 제법 총체적인 시간표였다.  

그렇게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2007년 12월. 동생 현이는 마지막 학기 졸업을 앞두게 되었고, 내손엔 퇴직위로금이 조금 쥐어졌다. 그리고 5년이 넘게 사귄 남자친구와는 헤어지고 염치없게 새로운 남자친구를 사귀며 미련과 설렘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정신없는 서른살을 보내고 있었다.

바야흐로 여행을 떠날 시기가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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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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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angcho 2008.06.19 15:59 신고

    그랬구나.. 아, 그랬구나. :)

  2. addr | edit/del | reply betterstory 2008.08.12 02:14 신고

    멋있어,참멋있어.

  3. addr | edit/del | reply io_love&free 2013.01.03 14:25 신고

    와- 이렇게 시작되었군요. 인도로의 여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