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 직장에 같이 있었던 언니가 퇴사했다길래 전화를 했다. 그만두기로 하고 난뒤 대표 때문에 너무 힘이 들었단다. 내가 그 상황을 알고말고. 내가 일을 그만둔다고 했을때도 대표는 눈 한번 안 마주치고 가는 날까지 말 한번 섞지 않았다. 근데 언니는 마지막까지 계속 마주보고 일을 해야 하는 상황이어서 더 곤욕스러웠는데 심지어는 볼때마다 째려보더라는 것이다. 하하. 비지니스를 하다보면 사람이야 들고 나기 마련이거늘 사업한다는 사람 마음이 그리 약해서야...

그 회사 대표 생각을 하다 참 코메디 같은 장면 하나가 생각났다. 
VIP 보고 일정이 생겼다며 촉박하게 ****위원회에서 홍보책자를 의뢰해왔던 때였다. 무슨 정부 산하 위원회 일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곤 한다. 마침 그 위원회의 다른 홍보물도 제작중이었기에 그쪽이 선호하는 디자인이나 방향 정도는 감을 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 위원회 구미에 맞을 만한 디자인 몇개와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접근한 디자인 시안을 준비했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새벽 1시가 넘어 디자인이 나오고 그걸 받아 인쇄를 걸어 콤보도에 붙이는 것을 마지막으로 다음날 아침 미팅준비를 마쳤다. 만찬 미팅에 갔다 1시가 다 되어 들어온 대표의 차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때아닌 3월에 큰 눈이 내린 날 밤이었다. 

서래마을을 지나는데 가로수가 아치형 터널을 만들고 그 위에 하얀 눈꽃이 피어있는 모습이 조명을 받아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어머 나무 위에 눈꽃 좀 보세요, 너무 예쁘네요" 하루종일 일로 찌들은데다 대표 옆에서 다소 긴장된 자리였으나 그 순간 만큼은 진짜 감탄사가 터져나왔다. 한번도 주류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삶을 살아온 듯한 우리대표는 씽끗도 하지 않더니 "여기 서래마을이잖아, 몰랐어?"라는 동문서답의 된장내 풀풀나는 답변을 하길래 뭐 이런 대표랑 공감대를 이루랴 하며 그냥 의전용 대화나 이어가며 집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아침 시청 인근 호텔 로비 커피숍에서 홍보위원장의 조찬모임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우리쪽은 나와 대표, 그쪽에서는 홍보실장과 홍보위원장이 참석하는 미팅이었다. 내가 제일 먼저 도착했고, 홍보실장이 도착했다. 무슨 정부산하 위원회 미팅은 이런 식으로 이뤄지곤 한다.

홍보실장이 위원장 오기 전에 시안을 먼저 보자고 하길래 몇개의 시안을 보여주며 각 시안별로 설명을 했다. 전문가로서 어떤게 이번 홍보책자에 가장 적합하겠냐고 묻길래 그동안 그쪽 위원회에서 만든 모든 홍보물이 실사와 지도 이미지를 활용한 안이었고 이번에 두 홍보물이 함께 보고되니 그동안 홍보물과 차별화하는 의미에서나 이번 홍보책자의 판형이나 컨셉이 핸디하게 제작되는 만큼 일러스트를 활용한 B안이 적합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잠시 후에 우리 대표가 도착했고, 마지막으로 홍보위원장이 조찬을 마치고 내려왔다. 
홍보위원장이 오자 홍보실장이 시안을 펼쳐놓고는
내가 시안에 대해 설명한 내용에 토씨하나 안 바꾸고 설명을 하며 위원장의 동의를 얻어냈다. 홍보실장의 설명 중 나에 대한 언급은 하나도 덧붙이지 않았다. 어쨋든 내 의견이 그대로 통한 것이니 성공적인 미팅이었다. 홍보위원장은 이 시안을 갖고 다시 상관 위원장에게 보고한 뒤에 연락을 주겠다 한다. 원래 무슨 정부산하 위원회 일은 이렇게 보고라인이 끝도 없다.

홍보위원장은 커피나 한잔 사겠다며 커피를 주문했다. 대표가 위원장에게 말한다. 
"어제 밤에 눈이 엄청 많이 왔잖아요. 밤늦게 서래마을을 지나가는데 나뭇가지 위에 눈꽃이 너무 예쁘게 피었더라구요."
위원장이 말한다.
"역시 여자분이시고, 홍보하시는 분이어서 감수성이 남다르시네요."
대표는 더욱 신이 나 한참을 얘기한다.

대표 역시 내가 한 말이라는 언급은 커녕 나와 함께 들어가는 길이라는 말 한마디도 덧붙이지 않았다. 
아 이 인간들은 내 앞에서 쪽팔리지도 않는 것일까. 하하하

정치조직에도 있어보고 사업체도 있어봤지만 그 직장생활이라는 것이 가끔은 무슨 연극같기도 하고 유치한 소꼽놀이 같이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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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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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고래배 2010.07.02 22:54 신고

    일은 다 비루하다는 올빼미의 격언이 팍팍

  2. addr | edit/del | reply 샨티퀸 2010.07.03 01:40 신고

    그래 어쩌면 조선생 말처럼 일이 아니라 내 자신이 비루한 걸지도 --;

  3. addr | edit/del | reply 바람처럼~ 2011.03.18 00:08 신고

    정말... 어른이 되니까 저런 일이 너무 자주 보이더라고요 -_-;
    에휴... 참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