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이다. 가을이 왔다가 보다는 확실히 여름이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독했던 더위도 그 기력을 다했다.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시간이 막을 내리는 순간이다. 1년이 넘도록 여름만 난 적이 있다. 인도, 한국, 태국, 캄보디아, 말레이시아, 싱가폴, 호주 가는 곳마다 내내 여름이었던 지겹고(?) 긴 여행이었다. 계절의 흐름이 없다보니 시간이 경계도 허물어졌다. 그래서일까. 어떤 날들의 기억은 긴 여행의 전부를 대변하는 것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 어떤 날의 기억이다. 

태국 꼬따오에서 12시간 동안 배를 타고 새벽녁 남쪽 어느 도시에 도착한 뒤 버스에서 봉고로 몇번을 갈아타고 말레이시아 국경에 다달아 출입국 신고를 하고 다시 배를 타고 페낭이라는 작은 항구도시에 도착했다. 말레이시아는 태국에 비해 여행정보가 워낙 없는데다 몸이 너무 고되 빈대가 출몰한다는 흉흉한 소식을 이겨낼 재간이 없어 여행중 처음으로 호텔을 찾았다. 그간 채 만원이 안되는 게스트하우스만 다니다 처음으로 한국돈으로 3만원이 조금 넘는 호텔을 찾았다. 가난한 배낭 여행자에겐 여간 큰 결단이 아니다.

인터넷도 되고 아침도 제공되고 에어컨도 가동된다. 몸이 모처럼 호사를 누리자 마음에도 여유가 찾아온다. 호텔에서 하루밤을 편히 보내고 나오니 호텔 앞에 트리샤(자전거 인력거)가 일렬로 대기하고 있다. 부모세대가 인도 첸나이에서 이주했다는 젠틀한 할아버지와 가볍게 흥정을 마치고 트리샤에 올랐다.


트리샤를 타고 속도에 몸을 맡긴다. 느리게 흘러가는 풍경들, 페낭 조지타운의 모든 것이 눈에 들어온다. 말레이시아, 중국인, 인도인이 한데 모여살고, 식민 역사를 거쳐 서양과 동양 문화가 섞여있고, 키가 다른 빌딩들이 조화를 이루며,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거리 속에 한 데 공존하는 항구도시 페낭. 얼마전 도시자체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고 한다.

동화속 궁전처럼 생긴 모스크에 도착해 안을 둘러봤다. 사원을 지키는 한 아저씨가 다가와 종교가 있느냐, 무슬림에 대해 아느냐고 물어온다. 나는 기독교인이고 무슬림에 대해 잘 모른다고 답하자, 우리도 네가 믿는 같은 신을 믿는다. 모하메드도 예수도 모두 선지자이고 우리는 오직 신만 섬긴다, 그것이 무슬림이라고 말한다. 명쾌한 설명속에 내가 믿는 하나님을 믿는 그가 친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내가 믿는다는 예수는 누구인가, 스스로에게 다시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사내들이 반바지 끈나시를 입은 몇 서양 관광객들의 옷차림을 빗대가며 나의 옷차림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적도에 가까운 무더운 날씨인에도 무슬림 사회라는 것을 감안해 긴팔 옷에 스카프까지 준비한 촌스러운 나의 행색이 그들을 흡족케 한 모양이다. 벤치에 앉아있는데 사원의 돔 뒤로 무지개가 떴다.


적도 가까이에서는 해가 지기 시작하면 거리가 활기를 찾는다.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지도도 보지 않고 발걸음을 옮긴다. 차이나타운의 한 사원이다. 커다란 사원에서 향을 피우고 복을 기원하는 그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하다.

그 열기를 뒤로 하고 한 블럭을 더 걸으니 이번엔 리틀인디아가 나온다. 이곳도 한창 축제분위기다. 열흘뒤면 다가올 디파바리 인도축제를 준비하느라 요란한 인도 음악이 흘러나오고 상점마다 볼리우드 스타들의 포스터로 장식되어 있다. 거리에 커리향이 가득하고 여자들은 모두 사리를 두르고 있다. 인도인들의 그 고집스러움에 웃음이 났다.


순간 인도에서 만난 따라가 생각났다. 인도 자이살메르의 성 어귀에 아이를 들쳐안고 앉아 팔찌를 팔던 한 여인 옆에 앉아 있던 조그만 동양여자 아이. 인도 여행 중 만난 한국애들은 위험하다며 몰려다니는 무리들 뿐이어서 혼자 길가에 앉아 있는 그녀가 한국인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그런 그녀를 푸쉬카르에서 다시 만났는데 같은 해 두번째 인도를 찾은 인도를 사랑하는 한국친구였다. 따라는 별이라는 뜻의 힌디인데 그녀의 한국 이름도 별이었다. 나는 푸쉬카르에서 매일 나가리 나가라라는 인도 고유의 타악기를 배웠는데, 하루는 따라를 초대했다. 나가라를 가르치는 인도선생은 괴팍했는데 악기에 대한 자부심만은 넘쳐나서 나가라 리듬을 제법 으시대며 설명했다. 그 모습을 보던 똘똘이 따라양이 우리나라에도 고유의 리듬이 있다며 굿거리 장단이며 자진모리 장단을 보기좋게 선보였다. 내 어깨가 으쓱해지는 순간이었다.    


호텔로 돌아와 오랫만에 인터넷에 접속을 했더니, 따라가 있었다. 기쁜 소식과 함께. 며칠전 있었던 대학가요제 은상을 받았단다. 좀 느린 속도로 검색을 해보니 동영상 자료가 여기저기 있었다. 이름도 랄라스윗, 인도에서 따라가 좋아하는 굴랍(설탕과자)집 이름이다. 무대의상도 푸쉬카르에서 산 꽃치마다. 아쿠스틱 감성 2인조 밴드의 노래 나의 낡은 오렌지나무가 신선한 충격과 함께 감동적으로 흘러나왔다.    
 
인도여행을 같이 했던 동생 사뇨의 홈페이지에는 졸업전시 작품이 올라와져 있고, 여행 떠나기 전 푸짐한 저녁상을 베풀어줬던 친구 슈니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있다는 소식이 홈페이지 방명록에 올려져 있었다. 다양한 것들이 만들어낸 말레이시아만의 매력에 취해 있던 그날, 세상의 모든 것들이 너무 생생하게만 느껴져 내가 정말 살아있구나하는 그런 순간이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지금, 랄라스윗은 크고 작은 공연을 이어가고 있고, 사뇨는 졸업후 애니메이션 회사에 다니고, 슈니의 딸 채령이는 벌써 돌을 넘겨 슈니를 닮아가고 있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나의 여행은 끝이 났지만 그 어떤 순간을 기억하는 것만으로 나의 무심한 일상이 위로를 받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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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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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쏘코린 2014.06.05 15:16 신고

    좋다.
    글도 좋고, 사진도 좋고. ^^

  2. addr | edit/del | reply 2014.06.08 18:27

    비밀댓글입니다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1.19 16:45 신고

      너의 고민을 백분 이해해. 언제나 응원해. 멋녀! 반년만에 댓글 달며 컴백 보고 하오 :)

  3. addr | edit/del | reply 바람처럼~ 2015.01.16 18:27 신고

    페낭에선 극락사밖에 기억나는 게 없네요.
    사실 말레이시아에선 택시 기사랑 싸운 것 때문에 엄청 싫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 더운데서 막 걸어다녔던 게 그립기도... (조금이지만...)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1.19 16:41 신고

      제게도 페낭은 아득한 기억입니다. 바람처럼님, 여행기 잘 보고 있습니다. 랏쵸드롬! 즐건 여행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