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루모스크와 마주보고 있는 성스러운 지혜란 뜻의 하기아 소피아로 향한다.

 

터키의 역사를 알면 세계 역사의 반을 아는 것이라는데 낯선 왕조 이름과 연도는 늘 어렵기만 하다. 그런데 사실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등 이스탄불의 또 다른 이름을 시대별로 구분만 제대로 하면 이스탄불의 역사는 의외로 쉽게 다가온다.


비잔티움  BC658-AD196년 그리스 도시국가 / 196-330년 로마 비잔티움

콘스탄티노플  330-1453년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1453-1923년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수도 / 1923년 이후 터키 공화국의 이스탄불(앙카라로 수도 이전)

 

기아 소피아는 이스탄불의 산 역사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로마제국의 수도를 천도한 330년 이래 비잔티움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꾼 이스탄불은 일 년 내내 축제가 끊이지 않는 경이의 도시였다. 호화로운 생활의 경제적 토대는 상업과 교역이었다. 이를 통한 막대한 이익은 모두 국가와 궁정에 귀속되었다. 비잔틴제국이 천년 가까이 지속된 결정적 이유이다. 비잔틴제국의 통치형태는 정교합일주의로 유례없는 완전한 제정일치를 이뤘다.

 

하기아소피아는 비잔틴양식의 정수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아들 콘스탄티누스 2세 때 처음 만들어졌다. 이후 두 번의 화재로 크게 소실되었으며, 오늘날의 모습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재위기 532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511개월만인 537년에 완공되었다. 헌당식에 참석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당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에 반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고 전해진다. 이후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비잔틴 제국 역대 황제와 황후의 대관식을 비롯한 중요 정치적, 종교적 의례가 거행된 비잔틴제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건축물이다.

 

1453 비잔틴제국이 오스만제국에 의해 무너지면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운명도 바뀌게 된다. 당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술탄 메메드는 기독교 세계 뿐 아니라 이슬람 세계에서도 잘 알려진 대성당 하기아 소피아로 곧장 달려가 무릎을 꿇고 겸손의 표시로 흙을 한 줌 집어 자신의 터번 위로 뿌렸다고 한다. 그런 다음 교회를 둘러보고는 그 아름다움에 반해 즉시 하기아 소피아에서 아야 소피아 자미라는 이름의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하도록 명령했다. 자신이 정복한 위대한 도시에 대한 메메드의 존중과 각별한 애정은 이런 위대한 도시를 약탈하고 파괴하다니!”라고 뜨겁게 눈물을 흘리며 탄식했다는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1923 오스만 제정이 무너지고 터키 공화국이 되면서 하기아 소피아의 운명은 또 한 번 바뀐다. 터키 정부는 하기아 소피아를 인류 모두의 공동유산인 박물관으로 지정하고 그 안에서 기독교든 이슬람이든 종교적 행위를 일절 금지했다.



기아 소피아 안으로 들어서자 홀린 듯 둥근 천장 아래로 향하게 된다. 그 아래 아치와 돔이 중앙의 돔을 받치고 있어 그 높이와 크기가 더욱 강조되어 보인다.돔은 언제나 절대적으로 큰 어떤 존재를 떠올리게 하며 그 아래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돌아보게 만드는 힘이 있다


육중한 돌의 느낌 때문인지 빛이 들어와도 실내는 전체적으로 어둡다. 커다란 돔 아래 회칠에서 복원된 비잔틴 양식의 성화와 이슬람 캘리그래피가 대조를 이룬다. 며칠 전 이슬람 양식과 기독교 양식에 대한 이해를 구해 들은 나진의 설명처럼 글씨 자체도 성상이 될 수 있음을 상기시킨 장면이다. 복원 중인 회칠된 천사의 얼굴에서 저렇게 복스럽고 귀여운 천사가 고개를 내밀었다. 이 모든 것이 현재 진행 중인 하기아 소피아의 모습이다.



여행을 하면 제일 먼저 그 도시의 역사적인 건축물을 찾기 마련이다. 유럽에서는 성당, 아시아에서는 사원이 대표적이다

역사적인 공간이 박물관 같이 박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 숨 쉬고 있을 때, 그리고 이방인인 내가 그 현장의 일부가 될 때 전율에 가까운 감동을 얻곤 한다. 인도 함피에서 쉬바라뜨리 축제 기간의 비루팍샤 사원이 그랬고, 태국 치앙마이의 선데이마켓에 장이 서는 랏차담넌 길 사원들이 그랬다. 그런데 하기아소피아만큼은 예외다. 이곳만큼 박물관으로 바람직한 공간이 또 있을까.


가장 대표적인 관광지인만큼 미국, 러시아, 이탈리아, 일본, 중국 등 국가와 언어를 달리한 그룹들이 무리지어 있다. 언어는 다르지만 순서를 바꿔가며 가이드들이 같은 지점을 가리키며 역사적 기록과 숨겨진 상징을 설명한다. 무리들은 설교라도 듣는 것처럼 가이드 말에 귀를 기울인다.


 

편의를 갖춘 비싼 호텔에 머물고 10분 거리도 관광버스를 타고 가이드를 따라 떼 지어 움직이는 패키지 관광객들이 일순간 부러워진다. 때때로 장기 여행자들이 유적지에 관심을 잃어가고 멍 때리기 선수가 되어가는 동안, 패키지 일행은 역사와 건축양식에 관한한 백과사전에 가까운 지식을 축적해 나가곤 한다.


영어, 한국어 그룹에 기웃거려봤지만 귀동냥은 한계가 있다. 결국, 많은 가이드북이 빚지고 있다는 이스탄불에 관한 현존하는 석학 존 프릴리의 이스탄불과 strolling the istanbul, 그리고 아르놀드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1권을 몇 차례 다시 살펴봐야 했다.



수많은 지진, 성상 파괴 운동, 4차 십자군의 강탈, 오스만군의 파괴 등으로 모자이크는 많이 남아 있지 않다. 당초 빠듯한 건축 일정 때문에 모자이크의 수준이 그리 빼어나지는 않다고 한다.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는 정면성의 법칙에 의해 그려졌는데 이는 인물을 인상 깊게 그려 존경심과 외경심을 느끼게 하기 위한 장치이다. 아르놀드 하우저 설명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비잔틴 예술에서 예수는 왕처럼, 마리아는 여왕처럼 그려져 있다. 두 사람 다 왕후에 어울리는 호화로운 의상을 입고사람이 가까이 갈 수 없는 냉담하고 무표정한 태도로 왕좌에 앉아 있다. 순교자와 성인들의 긴 행렬은 흡사 궁정의식 때의 황제 및 황후에 시종들처럼 장중하고 느릿느릿한 리듬으로 그들에게 다가가고 있고, 천사들은 마치 교회의 의식에서 지위 높은 성직자들이 하는 그대로 질서정연하게 열을 지어 들러리 역을 맡고 있다. 여기서는 모든 것이 장엄 화려하고 일체의 인간적인 것, 주관적인 것, 자의적인 것이 배제되어 있다


그 아쉬움을 카리예 박물관에서 달랠 수 있었다. 카리예 박물관은 비잔틴 교회였다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면서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가회칠된 덕분에 외려 더 잘 보존된 경우라 한다. 천장과 벽면 빼곡히 성서이야기가 그려져 있다. "교회의 그림과 장식은 민중을 위한 강의이고 독서"라는 한 신학자의 말이 이해되는 순간이다. 게다가 정말 아름답다. 이내 내 마음은 그림 속 가난한 여인과 같아졌다. 













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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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Yunmo 2018.03.13 07:52 신고

    아! 다시 가고픈 이스탄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