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스탄불에 가기 전 오르한 파묵 책 몇 권을 읽었다. 보스포러스, 골든혼, 쾨프테 같은 것들을 머리 속에 새기면서, 이스탄불에 닿기도 전에 베이올루 뒷골목을 걷고, 냄새 맡고, 맛 본 것 같았다. 오르한파묵의 자전에세이 『이스탄불』에서 파묵은 영어로는 '멜랑콜리', 터키어로는 '후준', 한국어로는 '비애'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했다. 동시에 몰락한 대제국의 패배, 남겨진 폐허 속에서 가난한 오늘을 사는 터키인들의 상실감을 자주 드러냈다. 책을 읽는 동안 상상 속 이스탄불은 언제나 슬픔을 가득 머금은 도시였다.

 

순수박물관이 숙소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서둘러 길을 나섰다. 오르한파묵의 소설 『순수 박물관』의 실재(實) 모델로, 파묵은 소설 집필 전 이 건물을 산 뒤 고물상과 벼룩시장에서 물건을 하나하나 사들이면서 박물관 오픈 준비와 동시에 소설을 써 나갔다고 한다.




노벨 문학상 수상 이후 첫 장편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이 소설은 한 여자와 만나 44일 동안 사랑하고, 339일 동안 그녀를 찾아 헤맸으며, 2864일 동안 그녀를 바라본 한 남자의 30년에 걸친 처절하고 지독한 사랑과 집착”(책 뒷표지) 두 줄로 요약이 가능한데, 그 이야기는 장작 2부에 걸쳐 853페이지로 씌어졌다. 이런 숫자와 집필 과정이 보여주듯 오르한 파묵 소설은 편집증에 가까울 정도로 구체적이고 사실적이다.


나는 『순수 박물관을 이렇게 요약하고 싶다. 1부가 당신은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요!”라고 믿고 싶었던 케말의 일상이 사랑을 잃고 난 뒤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면, 2부는 인생은 절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아요라는 절망으로 시작해 소중한 사람과 함께 앉아’ 있는 일상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를 이야기 하고 있다고. 1부에서는 상류사회에 속하는 케말의 가족애인친구들의 생활과 사고방식을 보여주는 니샨타쉬가 주요 배경이었다면, 2부에서는 추쿠르주마의 가난한 퓌순 집 거실 풍경이 주를 이룬다. 

 

위 따옴표는 주변인물의 대사에서 따온 것인데다음은 내가 읽은 오르한 파묵 책 전체를 통 털어 가장 좋아하는 구절이기도 하다. 좌우를 떠나 자신의 인생만 장밋빛이기를 바라는 일부 신앙인들과 속물들을 향한 내 마음과 같기 때문이다.  

 

시벨은 자임에게 우리만 아는 별명을 붙였다그것은 당신은 모든 걸 누릴 자격이 있어요자임’ 이었다그녀는 멜템 사이다의 광고에 나오는 이 카피가 무척 의식 없고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다많은 젊은이가 좌익이니 우익이니 하며 서로를 죽이는 터키같이 가난하고 고민 많은 나라에서 이 말은시벨에 의하면 추한 것이었다.

 



왜 하필 추쿠르주마였을까를 생각해 봤다. 외국인들이 점령한 니샨타쉬와도 다르고, 정돈된 이스티클랄 거리와도 다르다『검은책에서 보여준 이스탄불의 정체성, 이를테면 터키인들만의 제츠처 같은 것에 그가 얼마나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지를 생각하면 알 수 있을 것도 같다.  

 

순수박물관 입구에 들어서자 퓌순이 피운 담배꽁초 4,213개가 진열된 벽면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날짜별, 상황별 모양을 달리한 담배꽁초들이 가득 전시되어 있고, 바로 옆에는 담배 피는 손 영상을 담은 여러 스크린이 동시에 상영되고 있었다.


남의 아내가 된 퓌순 집에 매일 저녁 방문하여 앉아 있던 케말은 담배꽁초를 비롯하여성냥갑소금통커피 잔머리핀재떨이찻잔슬리퍼 같은 것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가령 퓌순이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면서 만지고 있던 소금통을 눈 깜짝할 사이에 주머니에 넣고는천천히 라크를 마시는 식이다. 찌질해 보이는 듯한 파묵 특유의 묘사는 묘한 중독성이 있다. 그의 '변태적 감수성'에 중독된 독자들은 베이올루의 뒷골목을 헤매가며 기어코 실재(實) 순수박물관을 찾는다.  


박물관 벽에 적혀 있는 '미래의 박물관은 당신 집 거실이 될 것이다'라는 글귀는 '작은 것이 아름답다', '개인적인 것이 정치적이다'와 같은 명제를 떠올리게 했다.  


 

순수박물관을 나와 걸었다. 목조 건물들 사이로 골동품 가게들이 줄지어 있었다. 오래되고 좁은 골목길을 돌아 나와 지한기르에서 에어룸 이스탄불(Heirloom Istanbul)이라는 카페를 발견했다. 소규모 시골 농작물과 수공예품 생산활동을 지원하고, 지속가능성을 추구한다는 안내 간판이 시선을 끌었다. 



1902년 오스만 시대에 지어진 건물을 자연친화적으로 리모델링하여 게스트하우스와 함께 카페를 운영하고 있었다. 카페 한 켠에는 80대 시골 할머니들이 만들었다는 친환경 그릇도마비누스카프 등이 진열되어 있었다. 오랫동안 준비한 은퇴 프로젝트라고 말하는 주인장의 얼굴에는 자부심이 넘쳐보였다.





아라 귈레르, 오르한 파묵과 같은 예술가와 지식인들을 시작으로, 지금 이스탄불에는 자신들 문화와 양식에 강한 애착을 갖고 스스로 정체성을 지켜 나가고자 하는 움직임이 일고 있는 것이 확실하다. 상상 속 비애의 도시 이스탄불은 이내 머리에서 사라졌다.   


발걸음은 지한기르, 톱하네를 거쳐 카라쾨이로 이어졌다. 낡은 거리 곳곳에서 새로운 일상과 예술이 싹트고 있었다. 카라쾨이에 이르자 언제나 그렇듯 뱃고동 소리, 생선 굽는 냄새, 모스크로 향하는 노인들, 데이트하는 젊은이들로 거리는 활기가 넘쳤다. 


오르한 파묵의 글 한 대목을 떠올렸다. 

"삶이 그렇게 최악일 수는 없어. 여전히 보스포러스로 산책 나갈 수는 있으니까"

















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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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호두나무 2015.03.09 18:20 신고

    글 잘 읽었어요. 이글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것은 '순수박물관'을 읽은 독자들은 그 골목을 어떻게 해서든 뒤져서 '찌질하게도' 그곳을 찾아간다는 것이죠. 제가 갔던 작년 12월 말..생각보다 많은 독자들이 그곳을 찾더군요. 상당히 부담스러운 입장료에도 불구하고 말이죠.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3.09 19:14 신고

      네, 맞아요. 박물관 안에서 만는 관객들과 묘한 동질감 같은 걸 느낄 수 있었어요. 호두나무님 반갑습니다. 저도 나무를 참 좋아합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2018.05.14 23:16

    비밀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