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이 일 때문에 늦게 되면 집으로 바로 오라는 귤센의 메일에 답신했다. 혹시라도 내 넝마 패션에 가족들이 놀라지 않았으면 좋겠다고.친구의 친구인 터키 방송사 기자를 만나러 가는 길, 청하지도 않은 집에 그것도 가족들과 함께 사는 집에 간다는 것이 다소 민망했다

 

앙카라에 도착해 그녀를 만나기로 한 시간까지 대략 서너 시간이 남았다. 나는 시내 번화가인 크즐라이 한 카페에 자리 잡고 앉았다. 관광객은 거의 보이지 않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 쿰피르로 요기를 하고, 카운터에 가방을 맡겨 놓고 투날르에 있는 쿠울르 공원으로 향했다. 약속 장소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쿠울르는 백조라는 터키어로 공원 호수에서 실제로 백조를 볼 수 있다. 이스탄불 게지공원으로 인한 반정부시위가 한창일 때 앙카라의 쿠울르 공원에서도 연대 시위가 진행됐다고 한다. 이후 고양된 시민의식으로 매일 밤 국민포럼이 열리기도 했던 곳이란다


쿠울루 공원 벽면의 낙서 A.C.A.B. (All Cops are Bastards) 왜 내 눈엔 이런 것만 보이는지!


공원 주변을 살펴본 뒤 카페로 돌아와 음료를 시키고 와이파이를 이용해 메일을 보냈다우리가 만나려고 하는 장소가 이곳 맞니? [쿠울루 공원에 있는 남자 조각상 사진 삽입], 나는 지금 크즐라이의 한 카페에 있어. [카페 사진 삽입], 혹시 이쪽으로 바로 올 수 있다면 여기서 만나면 좋겠어. [주소 삽입] 그리고 내 얼굴을 모를테니... 자, 나 이렇게 생겼어 [셀카 삽입] 이런 식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곳으로 오겠다는 답변을 받았다. 와이파이만 있으면 어디서도 가능한 실시간 대화. 스마트폰이 바꾼 여행 풍속이다.


그녀가 오기 전 화장실에 가 양치를 하고 땀에 젖은 얼굴을 한번 더 씻어냈다. 그녀는 민소매에 선글라스를 끼고 다가와 내 양 볼에 입을 맞추며 인사했다. 귤센이 예약해 놓은 로컬 레스토랑에서 근사한 저녁 식사를 한 뒤 택시를 타고 집으로 향했다. 내가 행색 타령을 해댄 탓인지, 집으로 가는 택시 안에서 자기 친구 이야기를 꺼냈다.

 

"나에게 반정부투사였던 친구가 한명 있어. 3년 전에 그녀는 정부의 일방적인 개발정책에 반대하는 도보행진을 하면서 이즈미르에서 앙카라까지 한 달 동안 걸어왔어. 옷도 안 갈아입고 거의 씻지도 못한 상태였지. 앙카라에 도착한 날, 친구를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어. 그때 친구 몸에서는 정말 냄새가 났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우리 식구들은 그녀를 욕실로 밀어 넣었지. 지금의 너랑은 비교 자체가 안 돼. 그러니 그런 걱정은 하지도 마."

 

집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던 엄마와 남동생은 나를 끌어안고 양 볼에 입을 맞추며 반겨줬다. 거실, 화장실, 주방 등 집에서 필요한 것들을 하나하나 설명해주더니 방으로 안내했다. 엄마 방이었다. 엄마는 거실 소파로 잠자리를 옮기셨다. 극구 사양을 했으나, 라마단이어서 밤에 활동을 많이 하기 때문에 그게 더 편하시다며 끝내 입장을 고수하셨다. 

 

엄마는 편히 입을 옷으로 갈아입으라며 귤센 옷을 주시더니 내게 빨랫감을 달라고 하셨다. 내가 집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마치 꿰뚫어보고 있는 것처럼 양말부터 속옷까지 빼놓지 말고 모두 넣으라고 하셨다. 

 

나는 귤센 옷으로 갈아입고 가방에 있는 옷가지 전부를 세탁기에 넣었다. 수줍게 샤프란볼루에서 사온 로쿰을 내밀고 엄마, 귤센, 동생 바투와 함께 앉아 차이를 마셨다. 나는 귤센 엄마를 안네라고 불렀다. 터키어로 엄마라는 뜻이다.


 

안네는 라마단 금식을 하고 있었다. 동생 바투는 낮에 일이 없는 날에만 가끔 금식을 한다고 했다. 리버럴한 무슬림이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귤센은 금식을 하지 않았다. 보통 무슬림은 하루에 다섯 번 아침에 해 뜨기 전, 정오를 넘긴 낮, 해가 질 무렵, 잠들기 전에 기도를 한다. 그리고 매주 금요일에는 모스크에 모여 예배를 드린다. 안네는 라마단을 지키고 매일 기도를 하지만 모스크에는 가끔 가신다고 했고, 귤센은 신을 믿지만 매일 기도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터키는 헌법에 기초한 세속주의 국가라는 것을 강조하며, 가족이지만 신앙의 형태는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귤센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다음날 귤센은 푹 자라고 나를 깨우지 않고 출근을 했다. 이른 아침 침대에서 일어나 방바닥에 누워 스트레칭을 했다. 방바닥에 허리를 대본 것이 얼마만인가.

 


나는 누워서 천상병의 시를 떠올렸다.


누가 나에게 집을 사 주지 않겠는가? 하늘을 우러러 목 터지게 외친다. 들려다오 세계가 끝날 때까지...  나는 결혼식을 몇 주 전에 마쳤으니 어찌 이렇게 부르짖지 못하겠는가? 천상의 하나님은 미소로 들을 게다. 불란서의 아르투르 랭보 시인은 영국의 런던에서 짤막한 신문광고를 냈다. 누가 나를 남쪽 나라로 데려가지 않겠는가. 어떤 선장이 이것을 보고, 쾌히 상선에 실어 남쪽 나라로 실어 주었다. 그러니 거인처럼 부르짖는다. 집은 보물이다. 전 세계가 허물어져도 내 집은 남겠다...”  내 집 / 천상병

 

두 남자 일생의 가장 절실했던 여행과 집! 그걸 동시에 꿈꾸는 나. 이렇게 욕심 부리다 다음 생엔 달팽이로 태어나면 어쩌나. 그러나 데이빗 소로우도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집을 짓자, 뭐야, 이동식으로 되어 있질 않잖아. 이 모양이니 보기 싫은 이웃한테서 어떻게 도망칠 수가 있나라며 불평한 모모스가 이해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무튼 나는 여행 중 허리를 대고 스트레칭을 할 수 있는 한 뼘 방바닥이 너무 간절했던 것이다. 이런 인연을 소개해 준 내 친구에게도, 나의 급작스런 방문을 반겨 준 귤센에게도, 먼 나라에서 온 이방인에게 침대까지 내주며 환대해 준 안네에게도 너무 감사할 따름이다. 







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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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김포처자 2015.02.14 10:46 신고

    달팽이로 태어나면 딱이네, 단,,문양이 터키 양식으로 멋지게 지어진 집으로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2.14 11:17 신고

      하긴 그래, 달팽이 정도면 집도 가벼우니 여행 다니기도 괜찮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