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 올림포스 해변에서 현지인 이스탄불 관광 가이드를 만난 적이 있다. 그는 전 세계에서 온 여행자들을 상대하다보니, 나라 별로 여행자 스타일을 구분할 수 있다고 했다. 특별한 것 없이 해변에서만 시간을 즐기는 소위 '바캉스 형’, 그리고 유적지나 명소를 찾아 다니며, 역사와 문화를 공부하는 '학습 형'이 있는데, 한국 여행자들은 후자에 더 가깝다고 했다. 수긍이 갔다. 나의 경우가 그랬다.  

 

독일에서 살고 여름마다 그리스 코스에서 지내는 리아와 함께 다니다 보니, 하루의 대부분을 '바캉스 형'으로 보내고 있었다. 바다와 햇빛, 그리고 바람을 온 몸으로 맞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야말로 시간을 멈추고 진공같은 상태로 비워내는 바캉스(Vacance)였다.

 

며칠을 이렇게 보냈더니, 학구열 넘치는 '학습 형' 유전자가 기승을 부렸다. "리아, 해변은 충분히 즐겼으니 우리 유적지나 명소도 좀 둘러볼까?" 이렇게 리아와 함께 코스 시내와 섬의 안쪽, 산간마을로의 여행을 시작했다. 


보통 그리스 여행은 고대 유적이 많은 내륙과 지중해 휴양지인 섬으로 구분하지만, 그리스 섬 어느 곳에 가더라도 고대 도시의 흔적을 만날 수 있다. 코스는 섬 안쪽으로 높게 솟은 디케오(Dikeo)산을 따라 올리브와 포도 등을 재배하는 산간마을이 흩어져 있다. 이 산줄기를 따라 올라가다보면, 섬 전체를 한 눈에 담을 수 있고, 고대 유적과 비잔틴제국 시절의 오래된 마을 풍경을 마주할 수 있어 해변과는 또 다른 여행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다. 

 

코스는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BC 460년경에 태어난 곳으로 고대 그리스 의학의 중심지로 알려진 곳이다. 지금도 항구 가까이에 히포크라테스가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히포크라테스 나무가 서 있다.


 

의학도들이 졸업하면서 낭독하는 히포크라테스 선서는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와 휘게이아와 판아케아를 비롯한 뭇 신들 이름으로 맹세하노니...'로 시작된다. 여기에 아폰론과 함께 등장하는 아스클레피오스(Asklepius)는 의술과 치료의 신이다


간략히 말하자면, 아스클레피오스는 아폴론과 인간 크로니스의 아들로 의술이 뛰어나 죽은 자를 살리기까지 해 제우스의 번개를 맞아 죽게 된다. 아폴론의 간청으로 뱀자리별로 소생했으며 이후 의술의 신으로 숭배 받게 됐다. 여기서 뱀은 허물을 벗고 재생하는 특징과 약초를 찾는 능력을 가진 동물로 고대부터 치유와 의료를 상징해 왔단다. 


 


아스클레피오스를 섬기는 신전은 고대 종합의료시설로서 역할을 했는데, 이런 신전을 가리켜 아스클레피온(Asklepion)이라고 부른다. 3층 구조로 된 코스의 아스클레피온은 지중해 전역에 분포된 약 300여개의 아스클레피온 중 가장 크고 유명한 신전 중 하나로 꼽힌다. 신전은 의술을 연마한 사제에 의해 운영됐으며, 환자는 치료를 받기 위해 먼저 사원에서 하룻밤을 보내야 했다고 한다. 이후 그날 밤 꾼 꿈을 얘기하고, 이 꿈 해석을 바탕으로 치료가 이뤄졌다고 전해진다. 동시에 목욕, 식이요법, 운동요법 등 다양한 치료법이 행해졌다고 한다.


기둥만 남은 신전 주변에서 명상하는 사람들을 보았다. 그 중 한 커플에게 다가가 관심을 보이자, 그들은 아테네에서 왔으며 명상과 요가로 수련중이라고 밝혔다. 고대 유적지에서 명상을 하면 집중이 잘 되고 정신이 맑아진다고 덧붙였다. 비단 '치유의 신전' 아스클레피온의 기운 때문이 아니더라도, 분명 당대 최고의 명당에 신전을 세웠을 테고 고대부터 많은 사람들의 기도와 염원이 깃든 자리라는 것을 감안하니, 꽤 일리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께 있던 리아가 뒤돌아서며 말했다. 요즘 유럽은 온통 요가와 명상 붐이야. 우리 엄마도 독일에서 요가를 하는데, 매일 에너지 타령이야” 시니컬한 듯, 경쾌한 리아의 반응은 금세 그들의 말에 혹해 있던 내 시각에 균형을 잡아줬다. 그래도 고대 유적지를 바라보는 하나의 관점을 얻은 날이었다. 이날 이후로 나는 고대 유적지에 가면 가만히 앉아 명상을 시도했다. 


 


아스클레피온을 나온 뒤, 디케오 산줄기를 따라 형성된 아스펜디우(Asfendiou) 일대를 찾았다. 아스펜디우는 지아, 하이후타스, 라구디 등을 아우르는 코스의 초기 정착촌으로 1850~1940년대에 번성했으나 지금은 인적이 드문 산간마을이다


이중에서 지아라는 마을은 섬의 전경을 한 눈에 내다 볼 수 있어 많은 여행자들이 석양을 보기 위해 찾아 온다. 지아 마을 입구에는 올리브 제품을 비롯한 다양한 수공예품 가게와 그리스 전통 식당이 줄지어 있었다. 우리는 한 식당에서 수제 버거와 레모네이드를 먹고, 이곳에서 2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하이후타스로 이동했다.


 


하이후타스는 주민이 한명도 없는 폐허다. 섬의 관광업이 발달하면서 주민들은 모두 해변가로 옮겨갔다고 한다. 최근에서야 한 개인이 이 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보전하기 위해 작은 박물관을 열고, 오래된 건물 외관을 그대로 유지한 채 리모델링을 해 카페를 운영하기 시작했다. 


염소가 뛰어다니는 폐허, 그 사이의 올리브 나무 아래 앉아 마시는 커피 맛은 일품이었다. 보물 같은 카페를 찾아내는데 일가견이 있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나인데^^, 지금까지 다녀 본 카페 중 가장 운치 있고 기억에 남는 장소를 하나 꼽으라면 나는 이곳 하이후타스를 꼽을 것이다.

 




하루는 코스 섬 중앙에 위치한 산간마을 피리(Pyli)를 찾았는데, 이곳에서 지오캐싱(Geocaching)이라는 재밌는 놀이를 알게 됐다. 지금은 폐허가 된 비잔틴제국 시대의 오래된 마을을 지나 산 중턱에 자리 잡은 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한 청년이 우리 뒤에서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는 커다란 나무 앞에서 보물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좋아했다. 패인 나무 홈에 손을 넣어 유리병을 꺼내더니 그 안에 있는 노란 노트에 방명록을 적고, 플라스틱 장남감 하나를 넣었다


지오캐싱은 GPS를 이용해 특정 좌표에 숨겨놓은 보물(Cach)을 찾는 게임으로, 세계 200개가 넘는 나라에서 500만 명 이상이 즐기고 있다고 한다. 그 청년은 산을 오르고 있는데 갑자기 GPS 신호가 울려 뜻밖의 보물을 발견하게 됐다고 아이처럼 좋아했다. 마침 리아와 내가 서 있는 곳에서는 산 아래로 바다까지 내려다 보이고, 맞은편 산 정상의 요새를 마주 볼 수 있었다. 이런 벅찬 풍경을 만났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보물같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몇개의 컨테이너 박스가 놓인 집시촌을 보았다. 해변과 산 중간 즈음 공터에 자리한 집시촌은 주변에 건물이나 마을이 없어 바다를 향해 시야가 시원하게 트여 있었다. 와우, 집시촌에서 내려다 보는 바다 전경이 엄청 멋지겠는데!"라고 말하자, "몇 해 전 우연히 그곳에 가본 적이 있는데, 아이들이 노는 별도의 컨테이너가 있고, 개집으로 사용되는 컨테이너도 따로 있더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주거환경이 좋았어."라고 리아가 답했다. 


한때 요르단 국왕이 집시들의 손재주를 높이 사, 그들의 정착을 지원하기 위해 현대식 거주지를 제공했다고 한다. 그러자 집시들은 시멘트로 만들어진 집 안에 가축을 기르고, 자신들은 다시 천막을 치고 잤다던 친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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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유머조아 2015.04.03 15:27 신고

    멋지네요.
    덕분에 그리스 여행 잘 하게 되네요, 사진으로나마~~

  2. addr | edit/del | reply 샨티퀸 2015.04.03 17:06 신고

    감사합니다. 저도 덕분에 유머나라에서 많이 웃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