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다치바나 다카시의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 서장을 그대로 인용했으며, 짧은 텍스트와 사진으로 구성된 원본의 표현양식을 따랐습니다.   



(전략)


에게 해 주변에는 유적이 셀 수 없이 많다. 그리스 본토에는 물론이고 에게 해에 점재하는 크고 작은 섬들, 그리고 바다 건너 소아시아(터키 아나톨리아 지방)에 다 헤아릴 수도 없을 만큼 많은 유적이 있다.

 

남아 있는 유적들은 참으로 다양하다. 거대한 도시국가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가 하면, 신전이나 극장만 덩그러니 남아 있기도 하다.




유적의 형태도 다양하다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혹은 크레타 섬의 크노소스 궁전처럼 완전하게 발굴되고 관리되어 관광코스의 일부로 자리 잡은 것도 있는가 하면외딴 산속에 묻혀서 누구 하나 찾아오는 이 없는 유적도 있다.

 



 

그 수많은 유적을, 우리는 악전고투하며 하나하나 꼼꼼하게 보고 다녔다.

 

왜 그렇게까지 해가면서 유적을 보고 다녔느냐고 묻는다면, 답하기가 간단치 않다. 유적의 실물을 오감으로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그 이유를 설명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중략)

 



그때 문득, 내가 여태까지 역사라는 것을 어딘가 근본적인 데서부터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지식으로서의 역사는 윤색된 것이다. 학교 강단에서 배운 역사, 교과서 속의 역사, 역사사가 말하는 역사, 기록이나 자료로 남는 역사, 그런 것들은 전부 윤색된 것이다. 


가장 정통적인 역사는 기록되지 않은 역사, 언급되지 않은 역사, 후세인이 전혀 모르는 역사가 아닐까.




기록된 역사를 기록되지 못한 현실의 총체에 비한다면, 우주 속의 바늘끝만큼이나 미소한 것이리라. 우주의 대부분이 허무 속으로 삼켜지는 것처럼, 역사의 대부분도 허무 속으로 삼켜지고 있다.




물론 유적 중에는 아테네의 아크로폴리스처럼 상세한 기록이 역사로 남아 있는 것도 있다. 그럴 경우라도 유적 현장에 직접 서보면 기록된 역사라는 것이 얼마나 왜소한 것인지 금세 깨닫게 될 것이다.

 

유적을 즐기는데 꼭 지식이 필요하지는 않다. 그 자리에 잠자코 잠시 앉아 있기만 하면 된다. 중요한 것은 잠자코잠시이다. 가능하다면 두 시간쯤 잠자코 앉아 있는 것이 좋다.

 



 

그러면 2천 년, 혹은 3천 년, 4천 년이라는 까마득한 시간이 눈앞에 굴러다니는 것이 보인다. 추상적인 시간이 아니라 구체적인 시간으로 보이게 될 것이다.

 

유적과 만나는 것, 그것은 시간을 천 년 단위로 보게 하는 것이다.


(중략)

 

영혼불멸을 말하는 종교에 대하여 니체는 영혼불멸 따위는 없다. 육체가 죽으면 영혼도 함께 죽는다. 그리하여 인간의 생명은 무로 돌아간다. 그러나 끝내는 모든 것이 영원을 회귀하는 것이다라고 설파했다.

 



일체는 가고, 일체는 돌아온다. 일체는 사멸하고, 일체는 다시 꽃핀다. 일체는 부서지고, 일체는 새로 연결된다일체는 헤어지고, 일체는 다시 만난다. 존재의 원환圓環은 영원히 스스로에게 충실하다


모든 찰라에 존재는 비롯된다. 만물은 영원히 회귀하며, 우리도 그와 함께 회귀한다이것이 짜라투스투라는 이렇게 말하였다에서 니체가 도달한 영원회귀의 사상이다.




시간은 한 방향으로 불가역적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다. 원환을 이루는 것이라고 한다. 과거는 곧 미래이고, 미래는 곧 과거다. 현재는 영원히 흘러지나가는 순간순간이 아니라 영원 자체다. 현재는 이미 과거에도 무한하게 반복된 적이 있고, 미래에도 무한하게 반복된다.

 

사람은 바로 이 순간 흘러가버리는 시간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을 살고 있다. ‘보라, 이것이 영원인 것이다.’라고 니체는 말했다.

 



머리로만 생각한다면 알 듯 말 듯 한 사상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인적 없는 바닷가 유적에서 잠시 말없이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이것이 바로 영원이라는 것이로구나, 하는 생각이 아무런 의문도 없이 똑똑히 느껴지는 때가 있다.

 

보았다

무엇을

영원을

 

일찍이 이렇게 쓰고 시인 노릇을 때려치운 이가 있었다. 영원을 보는 환시자幻視者이고 싶지만, 정말로 그것을 본다면 무서울 거라는 생각도 든다.


 

 



 

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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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I'm a deer 2015.04.09 15:50 신고

    아니! 그리스에서 보니 같은 옷도 여신처럼 보여요! 그리스 빨 제대로 받는 옷! 대박! 화보 찍고 오심ㅋ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4.09 22:15 신고

      저 옷 너무 많이 입어서 구멍이 수십군데 났어요. 꿰매고 꿰매 입다 스페인 마지막 여행지에 버리고 왔어요.ㅠ

  2. addr | edit/del | reply Gyugeun Lim 2015.04.14 22:10 신고

    부러운그대여?
    재밌있군요.
    보람찬나날이겠네요.
    나는생각만하...
    글도사진도요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4.15 00:27 신고

      이 포스팅은 '에게, 영원회귀의 바다'라는 책의 글귀와 표현양식을 빌린 거에요. 재밌게 봐주셨다니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