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레타는 신화의 고향이다. 신 중의 신, 제우스가 태어났다는 동굴도 크레타에 있다. 제우스가 본처 헤라의 눈을 피해 황소로 변신하고 에우로페를 납치해 사랑의 은신처로 삼은 섬도 이곳 크레타이다. 에우로페는 오늘날 유럽이라는 지명의 어원이 되었다.

 

크레타 섬의 미노아 문명은 고대 그리스 문명의 기원이자, 유럽 문명의 모태이다. BC3650년 시작된 미노아 문명은 아테네까지 속국으로 둘 정도로 융성했으나, BC1450년과 1400년 두 번의 산토리니의 화산활동으로 쇠락의 길을 걷다 역사 속에 사라지게 되었다. 크레타의 대표적인 유적지 크노소스 궁은 기원전 1700년경에 건축되어 140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며, 1300여개의 방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복잡한 설계된 미궁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이곳 크노소스 궁과 가장 관련 있는 신화 속 인물은 소의 머리와 인간의 몸을 가진 괴물, 미노타우르스이. 크노소스 궁전을 거닐며 미로 이야기를 흥미롭게 들려줬던 황경신의 <그림 같은 신화>를 떠올린다. 미노타우르스는 아테네의 영웅 테세우스에 의해 죽임을 당하기 전까지, 아무도 빠져나올 수 없는 미궁에 갇혀 아테네에서 조공되는 소년과 소녀를 잡아먹으며 사육되었다.

 

반인반수의 미노타우르스는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의 왜곡된 욕망이 낳은 자식이다. 파시파에는 바다의 신 포세이돈이 보낸 하얀 수소를 보자마자 욕정을 품고 괴로워하다, 장인에게 주문 제작한 암소 모형 속에 들어가 소를 유혹해 부적절한 관계를 맺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노타우르스가 세상에 태어나던 날, 그녀의 은밀했던 외도는 만천하에 드러나고 만다.


Pasiphae and the bull, 1880,  Gustave Moreau


머릿속에 떠오르는 비슷한 장면이 하나 있다. 초등학생 때 TV에서 보았던 미국의 흑인 노예 해방 전쟁 역사를 다룬 미니시리즈였다. 흑인 노예를 둔 백인 가문의 여자가 흑인 노예와 눈이 맞아 남몰래 사랑을 나눴다. 그녀는 엄격했던 집안과 시대의 뜻에 따라 자신의 사랑을 숨기고 백인 남자와 가정을 이뤘는데, 시간이 지난 뒤 흑인 아이가 태어나면서 온 집안이 발칵 뒤집히는 장면이었다.

 

여자의 비밀은 출산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라는 성적 억압은 너무 가혹하다. 세상이 왕비의 부정을 수군거리고 손가락질 하더라도 미노스 왕은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미노타우르스는 자신의 탐욕과 잘못의 결과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을테니. 미노스는 크레타 왕위 계승 다툼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에게 도움을 청했고, 포세이돈은 멋진 황소를 보내 미노스에게 권위를 실어주었다. 그렇게 왕이 된 미노스는 그 황소를 제물로 바치겠다는 당초 약속과 달리, 이 훌륭한 황소를 탐내 다른 소로 눈속임하여 제사를 지냈다. 미노스의 간교함에 크게 분노한 포세이돈은 파시파에를 이용해 미노스를 벌한 것이다.  


The Rape of Europa, 1869, Gustave Moreau


자신의 과오와 동시에 미노스는 미노타우르스에게서 자신의 태생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황소로 변신한 바람둥이 제우스와 에우로페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 역시 반신반우와 다름없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미노스는 미노타우루스를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그렇다고 세상에 드러내지도 못한 채 미궁 안에 꽁꽁 가둬버린 것은 아닐까.  

 

 

덧붙여, 제우스의 변신포세이돈의 선물괴물의 탄생 속에 얽힌 소 이야기는 고대 농경 중심사회의 황소 숭배 토템을 대변한다고 한다.




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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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2015.05.03 14:45

    비밀댓글입니다

  2. addr | edit/del | reply 샨티퀸 2015.05.03 23:38 신고

    멋쟁이님! 이미 초대장을 받으셨다고 메시지가 뜨네요. 한발 늦었습니다. 멋진 블로그를 기대합니다.

  3. addr | edit/del | reply Gyugeun Lim 2015.05.06 20:14 신고


    이미지도글도재미나요
    기다려짐니다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5.07 00:16 신고

      필립님, 여자의 입장에서 쓴 글을 재밌게 읽으셨다니 더 감사하네요. :)

  4. addr | edit/del | reply 김성민 2015.05.10 19:54 신고

    글 재밌게 끝까지 읽고 보니 네 글이었음 ^^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5.10 21:13 신고

      와우! 성민이 재밌게 읽었다니, 영광! 나도 너의 아테네 아크로폴리스 여행기 너무 재밌게 들었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