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호스텔 뒤편으로 난 길을 따라 산간 마을 미르티오스(Myrthios)에 올랐다. 폐허가 된 오래된 교회와 풍차를 지나 언덕 위에 서니, 산 아래 마을을 지나 바다가 한 눈에 펼쳐졌다. 당나귀만 지날 수 있을 법 한 좁은 가시덤불 길을 따라 간신히 마을에 도착했다. 한낮의 태양이 정수리를 바짝 따라붙더니 정신이 혼미해졌다. 샘터를 발견해 세수를 하고 벤치 위에 벌러덩 누웠다. 돌아갈 길이 벌써부터 걱정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잠시 후 차 한대가 서더니, 내려가는 길에 원하는 곳까지 태워주겠다고 한다. 가족여행자로 보여 안심하고 차에 올랐다. 이탈리아 북부에서 온 엔리코와 그의 아내 필라, 그리고 성인이 된 그의 아들 다니엘이 함께 여행 중이었다엔리코 가족은 십 년도 넘게 매해 여름 크레타를 찾는다고 했다다니엘은 엔리코와 전처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란다.


엔리코는 음악 스튜디오를 운영하며 다니엘과 드럼 아카데미를 진행하고 있고, 다니엘은 세션으로 활동하고 있단다. 젊어서 인도와 태국 등 아시아 여행했다는 엔리코는 요가와 불교 등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다며 내게 친근감을 표해왔다. 그러더니 크레타에서 자신들이 가장 좋아하는 비치에 가는 길인데,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적극적으로 청해왔다. 더위에 지친 나 역시 해수욕이 필요했고, 그리스에 있는 내내 수영복을 속옷처럼 입고 다녔으니 망설일 이유도 없이 그들을 따라나섰다.


엔리코는 비치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동네 단골 펍에 도착하기라도 한 것처럼 나를 여기저기 소개시켜 줬다. 포르투갈에서 온 노부부과 프랑스 산간마을에서 겨울 스포츠 매장을 운영하고 있다는 그들의 딸을 시작으로 독일 여행자 몇몇과 인사를 나눴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그들은 모두 알몸이었다. 조금도 긴장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고 다가와 환한 웃음으로 악수를 청하고 나를 반기고 있었다. 이곳은 누드비치였던 것이다.


 

매일 팟캐스트로 듣던 자연주의자들의 여름휴가 모습이 눈앞에 펼쳐졌다. 유럽에서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추구하는 자연주의자가 수백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이들은 사회적 위계가 아닌, 있은 모습 그대로 자신과 타인을 존중하고 자연의 일부가 되는 경험을 통해 진정한 자유와 쉼을 얻는다

 

미국에서는 흔히 자연주의자와 나체주의자를 같은 용어로 사용하지만, 유럽은 이를 확연히 구분한다. 옷을 벗었다는 데 방점을 찍기 보다는 옷으로부터 자유로운 상태에서 요가, 친환경 먹거리, 공동체 지향과 같은 자연친화적이고 웰빙을 지향하는 총체적인 라이프스타일을 가리킨다. 그래서 나체주의자(Nudist)라고 말하기보다는 자연주의자(Naturist)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그런데 여기에 재밌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이곳은 누드 비치라기보다 엄밀히 말해 옷은 선택적으로 입거나 벗을 수 있는 클로딩옵셔널 비치(Clothing Optional Beach)인데, 재밌는 것은 60대 정도로 보이는 노인들은 남녀 가리지 않고 모두 옷을 벗은 상태였고, 20-30대 청년들은 수영복을 걸치고 있었다.

 

유럽은 60년대 황금기를 겪고 히피문화와 68혁명 영향을 받아, 다양한 문화를 경험한 부모세대들이 때때로 자녀세대보다 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성향을 보여준다고 한다.


나는 유럽여행을 할 때나, 유럽 사람들과 대화할 때마다 항상 그들이 부러웠다. 그들의 건장한 체구부터 빼어난 언어 구사 능력, 다양한 문화적 자산, 특히나 EU내 여행, 공부, 일자리, 거주를 위한 이동의 자율성이 가장 부러웠다. 그들의 다양성을 부러워만 하다, 어느새 쪼그라들어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런데 여행을 하다보면 유달리 내게 관심을 보이며 먼저 다가오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에게는 하나의 공통점이 있었는데, 엔리코처럼 아시아 문화를 좋아하고, 인도 여행을 해 봤으며, 요가와 대체의학을 신뢰하고, 동양 철학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선망어린 눈빛으로 나와 내가 속한 사회를 궁금해 하며, 나와 조금이라도 더 교감하기를 원하는 그 친구들 덕분에 나는 내가 한국인임을, 동양인임을 스스로 긍정하는 연습을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종종 이런 말들을 건네 오곤 했다.

너희 한국 사람들은 왜 그렇게 날씬해? 분명 치즈나 요거트 같은 유제품을 먹지 않아서 그런 걸 거야.”

한국 사람들은 쌀을 먹어서 머릿결이 그렇게 좋은 거야?”

나도 서울 같은 도시에서 살아보고 싶어. 한국에는 김기덕, 박찬욱, 이창동, 홍상수 같은 훌륭한 감독들이 있잖아. 나는 그들이 만든 영화를 너무 좋아해!”

너네는 영적이잖아. 붓다나 달라이라마 같은 영적 지도자들도 있고

 

물론 영화 이야기는 전적으로 공감하고 내 어깨가 다 으쓱했지만, 그들이 동양에 갖는 환상은 대부분 허구에 가까웠다. 어쩌면 내가 유럽에 갖는 동경과 환상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여행을 하면 할수록 세상에 어떤 아름다운 장소도 내가 만들어 놓은 환상을 따라가지는 못한다는 생각이 들곤 한다. 그만큼 내가 키워낸 환상은 거대하고 힘이 센 모습으로 오랫동안 나를 지배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세상에 어떤 고상한 직업도 노가다를 수반하지 않는 일은 없고, 주위의 부러움을 사는 사람에게도 결핍과 그늘은 있으며, 어떤 나라도 무조건 축복을 받지는 않았다는 것을. 늘 여기가 아닌 저기에서 더 빛나고 행복한 삶을 꿈꿔왔던 내게, 여행은 그렇게 조금씩 나 자신을, 내가 살아가는 현실을 긍정하고 애정하는 법을 가르쳐 주고 있다.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의 온도도 떨어지고 파도도 거세졌다. 해변에 있던 사람들은 옷을 주섬주섬 챙겨 입고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고, 엔리코 가족과 그의 포르투갈 친구들만 남아 이야기꽃을 피워갔다


비치타올도 깔지 않고 맨몸으로 모래 위에 누워계시던 포르투갈 할머니는 옷을 입고 돌아가는 것이 아쉬웠는지 어둠이 내리기 직전 다시 물 속으로 뛰어들었다. 깊은 곳까지 헤엄쳐 가더니, 잠시 멈추고, 잠영을 위해 고개를 먼저 아래로 향해 입수를 한다. 물속으로 온 몸이 잠기기 직전 물구나무선 두 다리가 마지막 노을 속에서 날렵하게 반짝였다. 나는 살아있는 인어공주라도 만난 것처럼 감탄하는 마음으로 할머니의 우아한 몸놀림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0 :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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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이지은 2015.05.07 07:52 신고

    그러게~~ 그래서 여행이 좋은것 같네.
    만나자고한 사월은 가고 오월이 왔네~~
    오월이 가기전에는 꼬옥~ 만나^^

  2. addr | edit/del | reply 김포처자 2015.05.13 18:53 신고

    이글 넘 좋아~ 환상에서 넘어와 지금은 현실이 무게가 더 나가지만서도, 환상과 현실을 잘 넘나들며 살고 싶다요... 나에게 늘 환상을 자극시켜 주구려. 환상속의 그대여~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5.14 01:36 신고

      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김포여신만큼 줄타기를 잘 하는 사람이 또 있을라구!

  3. addr | edit/del | reply 핑글이 2015.08.03 01:57 신고

    재미나게 잘읽었습니당~
    누드비치관련 동호회 운영중인데
    해당글 소개해도 될까요?
    http://cafe.daum.net/nudelove1004

    • addr | edit/del 샨티퀸 2015.08.03 07:56 신고

      핑글이님 안녕하세요? 메일로 문의를 주시거나, 메일 주소를 알려주시면 관련하여 상세한 답변드리겠습니다.makepeace1@hanmail.net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