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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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말에 혼자 영화관을 찾아 갔던 나는 사랑니를 보고 나와서 완전 뽕 맞은 것 같았다. 영화 보는 내내 가슴을 졸였고, 영화가 끝나고 나서는 울고 싶어 미칠 것만 같았다. 누가 보든 상관없는 폭죽터질 듯한 그런 감정이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만 4년을 넘게 사귄 내 좋은 남자친구에게는 예의상 그 감정을 드러내지 말아야 할 것만 같았다. 한 친구는 사랑니를 보고 혼자 취해 첫사랑을 찾아갔고, 한 친구는 온몸으로 느낄까봐 두려워 절대 남자친구에게만큼은 보여주고 싶지 않은 영화라 했다.

나이 서른을 가까이 한 우리네들에겐 너도 나도 그런 추억이 있는 것이다. 옷을 열어 수술자국을 보여줬던 기억이, 일부러 책을 빌려보던 기억이, 한쪽 귀에 이어폰을 하나씩 꽂고 나란히 앉아 유행가를 따라 부르던 기억이, 너도 나도 그런 사랑의 기억이 있는 것이다. 네가 잘못했는지  내가 잘못했는지, 사랑해서인지 사랑하지 않아서인지, 원하든 원치 않든, 헤어졌던...... 너덜너덜해질대로 아팠던 사랑의 상처도 우리네들 가슴 한켠엔 저마다 추억으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억도 상처도 담담히 웃어넘길 줄 알고, 안정적 생활과 관계를 유지하는 서른 즈음, 흐트러짐 없는 목소리로 복잡한 수학문제를 풀어내는 학원강사 조인영은 첫사랑과 얼굴도 이름도 똑같은 열일곱살 이석을 만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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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비가 내리던 날 차로 이석을 집까지 데려다 주고 난뒤, 다시 뛰어 올라가 초인종을 눌러대놓고는, "나 갈께" 라는 인사만 남기고 도망쳐 나온다. 기억하는가? 스스로를 당황스럽게 하던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의 그 첫 감정을...

서른살 조인영, 그녀에게는 현재 동거하는 남자가 있다. 오랜 친구인 이혼남 정우이다. 첫사랑을 닮은 고교생 이석을 말하며 "나 걔랑 자고 싶어" 말해도 "에이, 그러면 안되지" 한마디 웃어넘겨주는. 첫사랑을 만나고 돌아오던 밤에는 전화를 걸어 고양이 사체가 있는 길을 피해, 다른 골목으로 올 것을 알려주는 마음씨 좋은 그런 남자이다.

조인영이 말한다. "어제밤에 비내린 거 알아? 잠자는 사람은 그걸 모르는거야." 정우는 모르는 것이다. 그의 옆에서 맨발로 그의 몸을 더듬다 스믈스믈 그의 몸 위로 기어올라가 침대에 가슴을 맞대고, 양팔을 벌려 수영하는 몸짓을 해대는 그녀의 갈증을, 그녀의 욕구를 그는 알지도 못하고, 채워줄 수도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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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른살 조인영과 열일곱 이석의 이야기에서 열일곱 조인영과 서른살 이석이 등장하면서 영화는 기존 영화 구성의 한계를 뛰어 넘는다. 서른살 조인영의 과거인줄 알았던 고교생의 풋사랑 이야기가 동시대의 현실이 되어 어느날 열일곱 조인영이 이석을 찾아 서른살 조인영 앞에 나타난다. 조인영도 관객도 그 당혹감을 떨치내기도 전에 그녀의 진짜 첫사랑인 서른살 이석이 미국에서 돌아온다.

서른살 조인영은 미국에서 돌아온 첫사랑 이석을 만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 열일곱 이석은 첫사랑 이석과 닮지 않았다는 것을. 그리워한 것은 첫사랑 이석이 아니라, 첫사랑의 기억. 그 설레임이라는 것을. 그리고 열일곱 이석이 또다른 첫사랑이라는 것을.

당황스러운 이 상황마저, 서른살 조인영, 그녀는 아파하지 않는다.
괴로워하지도 않고, 부정하지도 않고, 도망가지도 않는다.
그녀는 입꼬리를 올리고 야무지게 눈망울을 반짝이며 오늘도 그녀의 감정에 귀를 기울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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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인영이  학원에서 밤새 기다리던 이석을 찾아가 키스하는 장면, 내가 가장 좋아하는 화가, 샤갈의 사랑을 그린 작품- <생일>, <술잔을 높이 쳐든 이중초상>,<산책>의 감동이 떠올랐다.

영화를 보고 나와, 혼자 취해 있는데 여기저기 영화평이 좋지가 않다. 혹자는 현실을 버린 사랑의 전능함에, 영화의 전능함에 동의할 것이냐며 나를 조롱하는 것 같았고, 나의 상황 역시, 이런 기분에 마냥 취해있을 틈도 없이 토욜밤인데도 3개 방송사 조세정책에 대한 토론회를 모니터링하고 밤새 보고서를 작성했다.

영화평을 쓰고 싶었지만, 몰려오는 일상의 업무는 조금의 여유도 허락치를 않았고, 영화의 감동은 커녕, 줄거리마저 가물거린다. 애석하게도 나 스스로가 사랑의 감정만으로 현실을 살아낼 수 없다는 사실을 반증해 버린 셈이다.

그러나 나는, 이런 현실에 맞서 이 영화 사랑니를 사걀의 말을 인용해 변호하고 싶다.
"나에게 그림은 논리와 설명이 전혀 중요하지 않은 어떤 질서를 갖춘것들의 묘사로 뒤덮인 표면이다...
나는 환상과 상징이라는 말들을 싫어한다. 우리의 모든 정신세계는 곧 현실이다. 그것은 아마 겉으로 보이는 세계보다 훨씬 더 진실한 것이다."

현실에 두 다리를 딛고 살고 있으면서도, 머리속에서 꿈꾸는 사랑이, 이상이, 자유가 때로는 더 진실한 것이고, 안정적인 관계에서도 밀려오는 설레임에 대한 그리움이 때로는 더 강한 것이리라.
 
그 끝이 어땠는지,  얼굴이 어땠는지는 가물거릴지라도, 문득문득 그 따스함이, 그 설레임이 그리워지는 가을날. 서른을 즈음한 지독한 사랑을 해본, 헤어짐의 상처가 있는, 그 사랑을 그리워해본 적이 있는 당신에게 이 영화를 권한다. 영화가 말해주리라. 사랑은 대상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사랑은 내 안에 살아 숨쉬고 있는 생명체 같은 것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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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샨티퀸 트랙백 1 : 댓글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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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addr | edit/del | reply 미로속의루나입니다 2008.07.07 18:15 신고

    글에서도 아련함이 뭍어 나오네요.
    아련해지는 감정을 추스리며...
    글 잘 읽고 갑니다. ^^

    • addr | edit/del 샨티퀸 2008.07.07 20:56 신고

      루나님, 반갑습니다. 참 좋은 영화인데 뭍혔죠. 기회되면 꼭 보세요^^

  2. addr | edit/del | reply 허민 2008.07.08 10:59 신고

    샤갈의 말이, 이 영화가, 그리고 샨티퀸의 말이 정말이면 좋겠다.
    그것이 정말이라면..좋겠다.

  3. addr | edit/del | reply 샨티퀸 2008.07.09 00:58 신고

    구글에서 "사랑니 샤갈의 키스"를 검색하고 오신 분, 누군지 몰라도 환영합니다. ^^

  4. addr | edit/del | reply 샨티퀸 2008.07.09 01:00 신고

    그리고 7월 7일은 샤갈의 생일이었다네요. 영원한 사랑의 색을 남긴 샤갈 또한 생일 축하합니다.

  5. addr | edit/del | reply butnottome 2008.07.12 00:55 신고

    키스, 참 좋아하는 그림인데.
    처음 저 그림을 보고는, 저렇게 붕 떠오르는 느낌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심장이 막 두근거렸어요.
    사랑니의 그 키스신도 참 예쁘고 좋았답니다.
    와, 글을 읽으면서 막 짠하네요 ㅎ 잘 읽고 갑니다 ^^

    • addr | edit/del 샨티퀸 2008.07.12 14:37 신고

      사랑니,를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면 그렇게 반갑고 하죠?
      저도 정유미 참 좋아해요. 플라로이드 작동법 부터^^

  6. addr | edit/del | reply JBKeep 2008.12.28 04:02 신고

    아아, 이제야 이 영화를 보고..너무 감동받아서요.. 좋은글 잘읽었어요..비공개로 담아갑니다..^^

  7. addr | edit/del | reply 나영 2014.11.16 01:40 신고

    사랑니에 미친 1인..
    강산이 변했을 법한 세월의 야속함이 싫지않게 만들어준 이 영화에 무한감사를...